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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순 서울시장 일본순방 와세다대학 강연
  글쓴이 : 발행인     날짜 : 15-02-11 17:03    


 

[일본순방] 와세다대학 강연

새로운 역사,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어나갑시다
- ‘소통의 힘’, 서울시의 새로운 ‘소통’시정과 도시외교

皆.、こんにちは。ソウル市長朴.元淳です。
미나사마, 곤니찌와. 서울시쵸 박원순 데스.

강연에 앞서, 먼저 IS에 의해 희생된 유카와 하루나 씨와 고토 겐지씨의 명복을 빕니다. 일본 국민들의 충격과 고통, 슬픔과 함께 하며,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이번에 ‘도시안전’을 테마로 일본을 방문했는데, 테러대책에 대해서도 도시간 함께 공조하고 협력해서 시민들의 안전을 굳건하게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나겠습니다.

광복과 전후 70주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2015년의 첫 해외순방을 일본으로 오게 되어 대단히 뜻 깊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일본 최고의 명문대학 와세다대학 학생들과 도쿄 시민여러분들 앞에 설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고, 또 영광스러운 마음입니다.

와세다대학은 일본 전통의 명문사학입니다.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총리,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모리 요시로(森 喜朗) 총리를 비롯해 7명의 일본 총리를 배출했고, 수많은 기업의 최고경영자는 물론 한국에도 수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노르웨이의 숲’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등을 낳은 명실상부 정치와 경제, 학문과 지성의 상아탑입니다.

저도 과거에 와세다대학을 견학한 일이 있습니다. 2000년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 간 일본 시민사회를 견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인상 깊게 둘러보았던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 와세다대학이었습니다. 저는 와세다대학의 오랜 역사와 유서 깊은 학문적 전통이 주는 학풍과 기품에 큰 인상을 받았고, 500만여권에 이르는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의 위엄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시민운동가의 길을 걷던 저는 국가를 넘고 국경을 넘어, 보편적인 가치와 규범을 추구하는 시민운동가의 시각으로 일본과 일본 시민사회를 배우기 위해 일본의 구석구석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때 만난 일본과 일본인들에 대한 소회, 일본 시민사회를 인터뷰한 결과는 책으로 엮어 한국과 일본에서 함께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이렇게 많은, 각계 각층의 일본 시민들을 만났습니다. 일본의 여러 정치인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 그리고 시민들로부터 받은 인상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진지함과 그것이 주는 감동이었습니다.

제가 일본사회에서 발견한 것은 살아 있는 지역사회와 지역운동이었고, 개개인의 양심과 노력, 헌신들이 모여 서양사회의 법률에 기초한 공공사회와는 또 다른 튼튼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 개인과 집단의 성실성에 기초한 전통과 협동의 힘이 살아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철저한 지방분권을 기초로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의 변화를 유도하는 일본 시민사회의 활동과 시민력은 이후 저의 시민사회운동에도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말 중에 ‘마을만들기’(마치쯔쿠리)라는 말이 있지요? 건강하게 살아 있는 공동체, 활력 있는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한 ‘마을만들기’는 정말 부러운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한국의 지방자치단체장으로는 드물게 일본을 잘 아는 시장입니다. 일본을 자주 방문했고, 일본 전역을 돌며 취재한 경험이 있는 만큼 일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그림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본 전역을 거의 대부분 돌아다녔다고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저는 지금도 일본에 올 때면 마치 서울의 한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이동하는 ‘시내버스’를 타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오곤 합니다. 서울과 도쿄간 거리가 2시간 밖에 안되니까 한국이나 일본 내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편이지요. 한국과 일본, 서울과 도쿄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이렇게 가까운 사이입니다. 물론 정서적으로도 그렇지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일본에는 이런 속담이 있지요? “遠くの親戚より近くの他人”(도오쿠노신세키요리 치카쿠노 타닌) 한국에도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 는 말이 있는데요, 한국과 일본은 정말 가까운 이웃지간, “이웃사촌”사이입니다.

그런데 가까웠던 만큼 애증의 관계도 있었습니다. 역사적 비극이 있던 시기도 있었고, 직시해야 할 과거와 함께 풀어가야 할 과거사도 엄존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또한 1,50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로 함께 교류하고 협력해온 역사와 다양한 사상과 문물을 전파/전수하면서, 함께 서로를 배워온 공존의 역사가 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도 우리는 성공적으로 함께 했습니다.

얼굴도 비슷하고, 생활과 시스템, 법률도 비슷합니다. 세계인들은 한국인과 일본인을 잘 구분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비슷한 문제도 갖고 있습니다. 고령화, 저출산, 청년실업, 도시재생, 에너지 문제 등은 한국과 일본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이면서 함께 극복해야 할 현안입니다.

저는 21세기 지구가 운명공동체가 된 시대에 비슷한 것이 많은 한국과 일본이 열린 마음으로 함께 협력하고 함께 힘을 모은다면, 반드시 새로운 역사를 기약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길, 에너지와 환경을 위한 길, 공통의 도시문제를 해결하고,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는 길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함께 힘을 모은다면 새로운 역사, 새로운 미래의 길은 우리 앞에 활짝열릴 것입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도시외교’(city diplomacy)입니다.

21세기는 로컬 투 로컬(local to local), 피플 투 피플(people to people)의 시대입니다. 국가를 넘는 작은 실천들이 모이게 되면 국가가 풀어가지 못했던 문제, 외교가 넘어서지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할 단초를 찾을수 있을 것입니다.

작년 7월 마스조에 요이치 동경도지사의 서울방문은 바로 국가간 도시외교의 새로운 물꼬를 튼 상징적인 방한이었습니다. 한국의 언론들도 마스조에 지사의 방한을 대서특필할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지요. 나아가 마스조에 지사의 방한은 그 상징성을 뛰어넘어 서울과 도쿄간 실질적인 교류사업의 증가와 관계 증진으로 이어졌습니다.

도시안전 재난구조 활동을 함께 하고, 관광.문화 분야의 교류 협력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고, 대기질 개선과 기후환경에 공동 대응하는 등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소통과 교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배타적 국가이익 추구를 넘어선 도시 대 도시, 시민 대 시민간의 다층적이고 중층적인 연대와 협력은 결국 국가 간 갈등과 문제를 풀어나가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세계는 매우 빠른 속도로 ‘도시화’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UN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인구의 절반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고, 2050년이 되면 이 수치가 70%에 육박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또 2020년까지 인구 1000만 이상의 대도시가 12개 더 생겨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욱 나은 일자리, 더욱 나은 생활환경을 찾아 도시로 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도시는 창의성, 개발, 혁신의 강력한 허브로 변모하였고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들은 도시를 통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경제적 성공과 풍요 뒤에는 빈곤, 공해, 환경, 에너지,주거, 교통, 범죄, 일자리 등과 같은 여러 난제들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봉착해 있는 많은 글로벌 문제들이 사실 도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도시는 또한 변화와 혁신의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인구 천만의 대도시 서울도 도시화의 문제를 앓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드문 빠른 고속성장, 압축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근대화의 업적을 단기간에 달성했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한국의 수도 서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은 1950년 한국전쟁 직후만 해도 최악에 가까운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도로, 상하수도는 턱없이 부족했고 비위생적인데다 전염병마저 돌았습니다. 당시 1인당 GNP는 82달러 정도에 실업률은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던 서울이 약 30년 만에 세계적인 수준의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서울시정 10개년 계획, 서울도시 기본계획 등 관과 전문가가 주도하는 추진체계에 의해 서울은 빠르고 효율적인 도시화를 이뤄냈고, 인프라 구축과 도시 확장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고속성장이라는 빛나는 성취 이면에는 어두운 부작용과 갈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역 불균형과 계층 간 갈등, 도시 난개발과 환경오염 등은 더 이상 덮고만 있을 수도, 피해만 갈 수도 없는 눈앞의 현안으로 등장했습니다.

또한 안전, 복지, 교육, 보육, 실업, 양극화, 에너지, 자살, 초고령화,저출산, 범죄…… 등 수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울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있을까요?

여러분, 여기에서 잠깐 제가 살아온 저의 지난 삶에 대해 말씀 드려볼까 합니다. 한국전쟁 전후 세대인 저와 저의 동년배들의 삶은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경험한 그야말로 압축성장의 중심에 있던 삶이었습니다. 역동적이었던 한국의 현대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의 시대에 태어난 저는 그야말로 가난의 시대에 살았습니다. 제가 태어난 동네는 전깃불로 들어오지 않은 깜깜한시골이었고, 먹을 것도 변변하게 없던 궁핍한 마을이었습니다.

모두가 가난했지만, 그런데도 제가 살던 마을은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던 마을이었습니다. 바로 동아시아 특유의 전통적 가치,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 정신이 살아있었던 시골 마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서로 돕고 나누며,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살다보니 특별히 불행하거나 외롭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를 키운 건 8할이 이러한 ‘마을’의 힘이었습니다. 공동체의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 정신, 마을공동체의 힘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해줄 뿌리라고 굳게 믿고있습니다.

1975년 갓 스무 살이 된 저는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한국 사회는 군사정권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며, 산업화 추진이라는 미명 아래 민주화를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가담했고, 그 이유로 당국에 의해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급기야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지요. 여학생들과 미팅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대학에 입학한지 불과 3개월만에 맞은 ‘비극’이었습니다.그런데 돌이켜보면, 제 인생에 가장 중요했던 시기는 바로 대학 생활같았던 ‘교도소’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그 ‘교도소’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는데요, 특히 완벽한 ‘면학분위기’는 교도소의 장점이었습니다.

대학 생활과 청춘의 낭만은 엉망이 되었지만, 당대가 대면하고 있는 문제, 거대한 역사적 조류의 중심에 선 경험을 맛보았습니다. 독재와 맞선 시대와 “내 삶이 역사의 한 가운데 놓이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었지요.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성경』을 비롯해 헤르만헤세의 『싯다르타』,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을 읽었고, 무엇보다 독일의 법철학자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읽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구절, “법의 목적은 평화이고,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투쟁이다”는 문장은 이후 제가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가 되어 수많은 시민의 권리를대변하는 삶을 살 힘을 주었습니다.

교도소 출감 이후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의 길을 걸었지만 검사생활 1년 만에 옷을 벗고, 변호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누군가를 잡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았고, 군사정권 시절이었던 당시에 누군가는 수많은 정치적 양심수, 노동자, 학생들을 변론해야 했기에 인권변호사의 길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인권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펼친 수많은 변론 가운데 소송 하나로 한국 사회를 바꾼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요, 저는 변론을 준비하면서 일본의 지방재판소 후쿠오카 판례를 참조했고, ‘세쿠하라(성희롱) 신고센터’ 등 일본의 성희롱 사건 등을 소중하게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곤 마침내 승소판결을 얻어냈고, 그결과 한국이 양성평등의 길로 나아갈 불씨를 지폈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이 막을 내리고 한국이 민주화를 이뤄가고 있을 때, 저는 시민사회 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시민운동은 불모지나다름없어서 저와 시민운동가들은 민주주의와 시민참여라는 황량한 황야를 개척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를 만들고, 시민운동에 주력했는데요, 참여연대는 시민과 함께 법치주의 강화와 사회혁신, 민생안정을 위한 수 백 개의 법률을 만들어내는 성과를 이뤘습니다. 참여연대는 소위 ‘작은 국회’라고 불리어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비리, 부패, 무능한 정치인의 퇴출을 이끄는 낙천.낙선운동을 성공적으로 펼침으로써 한국의 낡은 정치 문화의 쇄신을 이끌어내기도했습니다.

저는 ‘참여연대’가 자리를 잡자 다른 소명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생소했던 나눔과 기부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를 시작했는데요, 나눔과 기부 문화를 확산시키고 재활용 산업과 공정무역 등을 실천하는 일들을 벌여나갔습니다.

시민운동, 나눔과 기부 문화 확산 등 당시의 활동으로 저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가게와 재단이 자리를 잡자 저는 한 발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찾고 대안과 희망을 키우는 사회혁신가들 이른바 ‘소셜디자이너’들을 양성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사회정의 실현과 사회혁신 등 소셜디자이너로서 제가 해왔던 일들은 제 후배들에게 이어져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지요.

저는 사람들을 만나면, “세상은 꿈꾸는 사람들의 것이다”고 말해주곤 하는 데요 제 인생을 돌아보면, 저 역시 늘 무엇인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왔던 삶을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11년 10월 저는 역대 서울시장으로서는 최초로 ‘정치인’이나 ‘행정가’가 아닌 ‘시민운동가’ 출신이라는 이력을 달고, 천만 시민의 삶과 안전을 책임지는 서울시장이 되었습니다.

저 그림, 보이시죠?

첫 번째 사진은 제가 서울시장이 되고 난 직후의 모습이고, 두 번째는 3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 세 번째는 앞으로 제 임기를 마치는 4년 후의 예상되는 모습입니다. 주름이 깊게 지고, 머리가 많이 빠질 것 같습니다.

서울특별시장, 참 어려운 자리입니다.

천만 인구의 거대 도시답게 서울은 수많은 문제와 다양한 이해관계, 갈등들이 내재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3년 전 서울시장에 취임한 저는 “모든 사람과 관련된 문제는 모든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말처럼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모여 함께 방법을 찾고,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시장 취임의 변으로 “시민이 시장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시민의 삶을 바꾸는 시장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저는 이를 원칙으로 시민과 함께 협치를 이루며, 서울시정을 새롭게 혁신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서울시 혼자의 힘이 아닌 시민-전문가-기업 등 민-관-기업이 소통, 참여, 거버넌스를 통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혁신’에도 박차를 가했습니다. 저는 서울시장에 취임하자마자 한국의 지방정부로는 최초로 ‘서울혁신기획관실’을 신설해 행정 혁신을 도모했고, ‘갈등조정관’이라는 직위를 만들어 천만 시민의 이해와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행정 혁신의 핵심은 단연 “시민이 시장입니다”라는 모토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시의 모든 행정 혁신은 결국 시민과 함께 꿈꾸고, 함께 만들고, 함께 누리는 서울, 더불어 행복한 삶의 특별시를 만들고자하는 길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서울시는 근본적인 행정의 패러다임을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무거운 관료주의의 옷을 벗고, 책상머리에서 상상하는 탁상행정에서 벗어나 시민중심의 시정, 시민이 시장인 시정, 현장주의 시정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원순氏 스타일’로 불리는 서울시의 소통행정입니다. 그렇다면 서울시의 소통행정은 어떻게 펼쳐지고 있을까요?

소통을 잘 하려면 먼저 잘 듣는 법, 경청을 배워야합니다. 그래서 서울시는 관청 ‘청(廳)’자가 아닌 들을 ‘청(聽)’자를 써서 시민의 목소리를 듣는 ‘청책토론회’를 자주 개최합니다. 처리해야 할 현안이나 미래의 정책을 만들 때면 가장 먼저 시민을 모시고 시민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면밀히 검토해서 서울시의 정책으로 만들어냅니다.

제 취임 이후 올 1월까지 ‘초미세먼지 대응방안’ 등을 포함 총 90여회의 청책토론회에 1만2,000여명의 시민이 참여해주셨고, 이는 고스란히 서울시의 정책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전문가들과 함께 토론하는 ‘숙의’는 서울시의 정책을 한층 더 전문화시키고, 아울러 반대의견까지 수렴해서 아우르는 공론의 장이 되고 있습니다.

百聞は一見にしかず(햐쿠분와 잇켄니 시카즈, 백문이 불여일견)”라는 말처럼, 현장에서 직접 시민을 만나서 시민의 말씀을 직접 듣고, 체험하는 일도 매우 중요한 시정원칙입니다. 저는 시장에 취임한 이후 현장의 문제를 풀기 위해 현장에서 숙박하며 시장실을 꾸리는 ‘현장시장실’을 운영했고, 총 120여회가 넘는 현장에 방문했습니다.

처음 갈등 현장에 나갔을 때는 시민들로부터 멱살도 잡힐 뻔하고, “물러나라”는 야유도 듣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대책을 모색해나가자 이후에는 오히려 “시장의 팬이 됐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도 생겼습니다. 저는 이렇게 현장에 가면 문제해결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현장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시는 모든 정보의 개방, 공개, 공유를 통해 시정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책임성을 강화하는 행정혁신도 이뤄냈습니다.

열린데이터광장의 3,672개 데이터셋, 행정정보공개 자동시스템을 통해 공개된 351만여 건의 행정정보는 이제 서울시민이라면 누구나 열람하고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정보와 가치 창출의 곳간이 되고 있습니다.

모바일 시민시대에 걸맞게 스마트폰을 필두로 한 온라인소통의 길도 활짝 열었습니다. SNS 혁신행정은 그야말로 빛의 속도, 광속행정 시대를 열었습니다.

시장인 저의 SNS 팔로워는 트위터 100만명을 포함해 150만명을 넘었고, 저의 SNS는 세계시민 누구에게나 열린 민원의 광장일 뿐만 아니라, 정책공론의 아고라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제 팔로워가 계신가요?

혹시 팔로워 신청하시면, 제가 바로 ‘맞팔’ 해드리겠습니다.

2012년 어느 날, 제 트위터에는 이런 글이 날아왔습니다.

“존경하는 서울시장님 저는 서울시내버스 ○○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버스노동자입니다. ○○기업은 지금도 상습적으로 임금을 체불하고 있어  버스노동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꼭 해결 좀 해주십시오.""

 저는 이 트윗을 바로 서울시 교통본부에 전달했습니다.

 "시장님, 임금이 입금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4일 후 다시 제 트위터로 날아온 그 분의 메시지입니다.

“박원순 시장님 감사합니다. 체불임금이 어제 입금되었습니다. 300여 버스노동자들이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빨리 해결될 줄은 기대도 못했는데 이번 어린이날은 아이들에게 아버지 노릇도 하게 됐네요.”

여러분, 서울은 지금 이렇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집 앞 보도블럭이 깨져 있어서 불편해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시장님, 지하철역 휠체어 리프트가 고장났어요?”

“집 앞 보도블럭이 깨져 있어서 불편해요”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냄새가 나요”

저는 이 모든 시민의 목소리를 보고 곧바로 서울시의 해당부서 직원에게 넘겨줍니다. 시민의 잔소리, 쓴소리는 곧 웃음소리로 돌아옵니다.

“내 의견이 세상을 움직일 수도 있다니!” 이런 메시지도 있습니다.

“나 지금 쫌 감동받고 있어. 초등학교 앞 공중 전화부스가 상당히 위험한데 몇 년째 방치돼서 내가 사진 찍어 서울시장님께 보냈더니 한 2주일 만에 철거가 됐지 뭐야. 설마 나 때문일까 했는데 오늘 답장이 왔어! 나 때문이라구! 우와. 내 의견이 세상을 움직일 수도 있다니!”

“제가 시장이 된 기분이에요”

“시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의 작은 목소리가 이렇게 시정에 반영될 줄 몰랐어요. 제가 정말 시장이 된 기분이에요”

시민들로부터 이런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비록 저는 몸과 마음은 힘들어도 “서울시장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시민의 행복이 곧 저의 행복인 것이지요.

서울시는 이렇게 시민과의 소통 속에서 ‘협치’와 ‘혁신’을 통해 ‘서울의 꿈’을 하나 둘 이뤄가고 있고, 도시의 문제를 하나 둘 해결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입버릇처럼 하는 “‘협치’와 ‘혁신’은 서울의꿈을 이루게 해줄 두 날개가 될 것”이라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에너지 환경 문제에 적극 대응하는 ‘원전 하나 줄이기’ 사업도 바로 시민들과 함께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이뤄낸 결실이었습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에너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지방에서 생산된 전력이 오지 않으면 도시기능이 마비될 수밖에 없는 서울로 하여금 에너지정책을 성찰하는 계기를 주었습니다.

서울시는 시민과 함께 에너지 위기 극복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화석연료 에너지가 아닌 친환경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을지 연구하고, 토론하고, 머리를 맞댔습니다.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원자력발전소 1기의 발전량 200만TOE 줄이기를 목표로 하는 ‘원전 하나 줄이기’ 사업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에너지생산, 효율화, 절약이라는 3대 분야를 중심으로 미래세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원전 하나 줄이기’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려는 믿음과 책임감이 촉발시킨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시민들은 가정과 학교에서 태양광 설치에 적극 참여하며 햇빛발전소 만들기에 동참했습니다. 에너지절약에 대한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에코마일리지’는 170만명이 가입하여 가정과 학교에서, 직장에서 에너지절약을 생활화했습니다.

2014년 6월, 드디어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 속에 당초 계획보다 6개월이나 빠른 시간에 200만 TOE 절감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불가능한 꿈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이 서울을 에너지 자립도시의 꿈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다다가게 한 것입니다.

세계의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UN공공행정상, WGBC(World GreenBuilding Council) 기후변화 리더십상, 세계자연기금(WWF), C40-지멘스 도시기후리더십어워드 등이 서울시의 원전 하나 줄이기 사업을 주목했고, 이를 기념하는 상을 주었습니다.

서울시는 이제 ‘에너지 소비의 도시’에서 ‘에너지 살림의 도시’로 전환하고자 ‘원전 하나 줄이기 2단계’ 사업을 시작합니다. 원전 하나 줄이기 2단계가 성공한다면 서울의 전력자립률은 20%까지 올라가고 400만 TOE의 에너지가 절감되며, 1000만 톤의 온실가스가 줄어들게됩니다.

에너지와 환경에 대한 대도시의 책임은 앞으로 우리 사회를 더 지속가능한 미래의 길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아울러 다음 세대로부터 잠시빌려 쓰고 있는 지구를 온전히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유일한 길이될 것입니다.

#서울시정홍보 동영상(일본어 버전- 4분)

여러분, 여기에서 잠깐, 서울시가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서울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실까요?

(동영상 생략)

네, 서울은 지금 이렇게 운영되고 또 변화하고 있는데요.

이 모든 일들을 서울시 혼자의 힘이 아닌 민-관-기업 등과 함께 해나가고 있습니다. 소통과 참여로 함께하는 ‘협치’와 협치가 만들어낸 ‘혁신’은 서울의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혁신’은 변화의 동력이 될 것이고, ‘협치’는 통합의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서울은 일본의 모리재단이 조사하는 모리지수에서 3년 연속 세계도시경쟁력 6위라는 결실을 이뤄냈습니다. 세계 전자정부 평가 1위, 관광 분야 3년 연속 컨벤션 5대 도시, 2년 연속 베스트 국제 비즈니스미팅도시로 선정되었습니다. 한 해 서울을 방문하는 관광객 수는 이미 1000만 명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이제 서울은 세계가 찾는 글로벌 도시가 되었습니다.

서울시의 행정우수사례는 21개국 22개 도시로 수출되고 있고, 세계의 여러 나라와 유수의 도시들을 서울로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세계는 도시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국가 대 국가 간의 경계를 넘어 도시와 도시, 지역과 지역, 사람과 사람 간의 실질적인 소통과 교류, 협력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구적 운명공동체의 시대에 어느 한 도시의 문제는 이제 그 나라의 문제, 그 도시의 문제로만 국한시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서울과 도쿄의 오늘, 베이징과 뉴욕이 고민하고 앓고 있는 오늘의 문제는 도시를 넘고, 국경을 넘어 세계시민 모두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전 지구적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실제로 서울과 베이징이 기후대기 문제에 공동대응하고 있고, 작년 9월 뉴욕에서 서울과 베이징, 도쿄 등 13개 도시 대표들이 모여 도시별 대기오염 감축목표를 정하고 공동대응으로 달성해 나가겠다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한 것도 모두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86개국 1000여개의 도시·자치단체를 회원으로 둔 기후환경분야 세계최대 지방정부 네트워크인 이클레이(ICLEI)가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해 함께 협력해나가고 있는 것은 도시와 지방정부가 도시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올해 ‘이클레이 세계총회’는 4월에 서울에서 열릴 것이고, ‘이클레이서울총회’는 도시 간 국제기후변화 협력체계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될 것입니다.

이제 한국과 일본의 도시들도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열어나가야 합니다.

국가에서 도시로, 국민에서 시민으로, 정치에서 경제/사회/문화로 그 폭을 넓혀 나가야 합니다. 올해는 특히 광복과 전후 70주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이제야말로 우리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새로운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과 일본 양국의 국가적 관계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정세도 과거사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길은 막히고, 다리는 끊겨 있습니다.

이제 한국과 일본은 현실을 직시하고, 과거를 진심으로 성찰하면서, 미래를 향한 공동의 비전과 방향을 설정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누군가 꿈을 꾸고, 함께 실천해나간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만들어 유럽 통합의 정초를 다진 로베르 슈만과 장 모네의 길을 우리는 새겨봐야 할 것입니다

프랑스와 독일은 2차 대전에서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적국들로 철천지원수지간이었습니다. 분노와 증오의 역사가 낳은 냉전적 관계에 길을 낸 사람은 프랑스의 외무장관이었던 로베르 슈만과 외교관장 모네였습니다.

유럽에서 2차 대전을 뒷받침했던 핵심 자원인 석탄과 철강을 공동 생산하고 관리하는 공동기구를 만들자는 제안은 마침내 1951년 4월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출범으로 이어졌고, 독일과 프랑스 간 자원 공동관리 시스템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바야흐로 유럽 통합의 디딤돌로 이어졌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54년 파리강화조약으로 양국은 전후 문제를 처리했고, 1963년 프랑스 샤를 드골 대통령과 독일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간에 체결된 엘리제 조약은 독일과 프랑스를 완전한 화해의 길로이끌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적 화해의 출발은 바로 경제적 이익을 공유하는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경제 협력이 뿌리가 되고, 역사 화해가 줄기가되어, 평화와 번영의 꽃을 피웠고, 마침내 유럽연합(EU)이라는 통합의 열매를 맺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도 새겨봐야 할 것입니다. 독일은 2차 대전과 관련해 전승국들과 이스라엘, 폴란드 같은 피해 국가들에 국가배상금을 이미 지급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독일정부와 독일기업은 전시 피해자 배상을 위해 100억 마르크(엔화 환산)라는 기금을 마련해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을 설립했습니다. “도덕적 책임감과 연대감, 그리고 자기존중심에서 출발해 확고한 인도적 신호를 보내자”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재단은 2차 대전 당시 독일정부와 독일기업들에 의해 강제 징용된 피해자들에 대한 도의적 배상과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해 주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상처의 치유 없는 화해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든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100년 전쟁,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영국, 독일과 폴란드는 수세기 동안 서로 싸우고 죽이는 전쟁을 했습니다. 적대감이역사가 되어 서로를 상처 냈고, 증오의 복수가 대물림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진심어린 성찰과 반성, 화해를 통해 과거를 용서하고, 오늘을 함께 살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 중국을 비롯해 우리 동북아시아 국민 모두가 함께 행복한 꿈, 나아가 아시아인 전체가 영구평화와 공동번영의 공동체를 이뤄내는 꿈, 그런 꿈을 우리는 꿀 수 없는 것일까요?

더구나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젊고, 미래를이끌어나갈 여러분이 그 꿈의 주인공이 되어주십시오.

저는 한국과 일본, 서울과 도쿄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모두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찰과 화해 속에서 동행의 길을 찾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소통과 협력의 길에서 평화와 번영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을 드립니다.

서울과 베이징, 서울과 도쿄의 양자관계를 넘어서 베이징-서울-도쿄가 함께 하는 베세토(BeSeTo) 협약을 부활시켜 ‘뉴 베세토 트라이앵글’ 체제를 함께 열어나가 봅시다.

과거를 성찰하고 화해해서 미래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 앞에 놓인 도시의 문제들, 고령화 저출산 에너지 기후대기 도시재생의 현실적문제, 지속가능한 미래의 길들을 함께 찾아나갑시다.

작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지성클럽’은 베세토 재구축 추진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앞으로 더 탄탄하고 끈끈한 ‘뉴 베세토 트라이앵글’ 체제를 구축해나간다면 베이징-서울-도쿄는 동아시아의 영구평화와 공동번영을 이어줄 굳건한 삼각편대를 이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다이모 히도리와 우마카라즈”(鯛(たい)も 一人(ひとり)はうまからず )라고 했지요?

함께 소통하고, 함께 교류하고, 함께 협력해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희망과 미래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속담에 “히토리노 햡뽀 요리 햐쿠닌노 잇뽀”(一人の百歩より百人の一歩,한 사람이 백 걸음을 걷는 것보다 백 사람이 한 걸음을 걷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는 “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가올 미래에 우리 자손들이 전쟁과 테러의 위협이 없는 나라에서 살고, 지속가능한 삶을 이어갈 도시에서 미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길을 우리가 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남긴 무거운 짐을 떠넘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가 다음 세대의 ‘미래’ 가 되지 않도록 우리 함께 지혜를 모아 나갑시다.

皆(みな)さんも、一緒(いっしょ)にご協力いただけますか。
미나상모 잇쇼니 교우료쿠시테 이타다케마스까.

今日[きょう)、私たちの出会(であ)い、疎通(ソトン)が、韓国と日本

ソウルと東京、そして、東アジアが手を携(たずさ)えて、みんな幸(しあわ)

せで、ともに繁栄する未来を作り出すための、一粒(ひとつぶ)の麦(むぎ)と

なることを願っています。

교우, 와다시 다치노 데아이, 소통가 간고쿠또 니혼,

서우르또 도쿄, 소시테 히가시아지아가 테오 다즈사에테 민나 시아

와세데 도모니 항에이스루 미라이오 츠쿠리다스 다메노 히도츠부노

무기또 나루 고토오 네갓데 이마스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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